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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닝머신 위에서 시나리오 본문 1. 집(내부/낮)_사고현장 접근금지. 노란색 테이프가 런닝머신을 중심으로 크로스되어 알파벳 엑스를 확고히 내리 긋고 있다. 네 다섯 명이 바쁘게 현장을 왕래하며 사진을 찍어대고, 형사들이 사건 현장을 아이패드에 기록한다. 바닥에는 백색 분말 가루가 시체가 있던 자리를 알려주기라도 하듯 굵직하게 둥그렇게 둘러쳐저 있다. 런닝머신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알루미늄 선반이 위치해 있고 주인을 잃은 듯한 신발 한 쪽이 끈이 풀린 채 덩그러니 놓여 있다. 반장 상훈(50대 중반) 등장한다. 두준 (경례하는 척) 오셨습니까. 상훈, 시큰둥한 표정으로 사고 현장을 쭈욱 바라본다. 두준 런닝머신을 타다 발을 헏디뎌 선반에 머리를 찌었어오. 충격으로 뇌출혈 발생. 집에 돌아온 가족이 시신 발견. 119 .. 2024. 4. 23.
복실이는 참 복도 없지 사생결단: 죽고 사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끝장을 내려고 함. 사(死) 신은 죽었다. 니체가 개소리를 선언하고 백 년이 지난 어느 병동에서 나는 그 빌어먹을 문장이 도대체 뭘 의미하는지 뼈저리게 알게 됐다. 이유 모를 원인으로 고꾸라진 여자의 차가운 가슴을 두 시간 동안 압박하면서 내가 찾아댄 건 신 대신 자동재새동기였으니까. 그리고, 50분 만에 도착한 보호자가 핏대를 치켜세우고 원망을 배설한 대상 역시도 와이프를 죽음으로 이끈 신이 아닌 땀에 범벅 댄 의료진이었으니까. 차갑게 식어버린 한 구의 시체를 영안실로 옮기면서 나는 미세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무슨 소리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의문의 사운드는 담배연기치럼 미세하게 피어오를 뿐이었다. 아수라장이었던 아까와 달리 적막한 복도.. 2024. 3. 31.
결정 장얘(愛) 내가 그녀를 사랑해도 될까? 남자는 늘 결정을 내리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에게 삶은 결단의 연속이었고 그 선택에 따라 때때로 그는 혜택을 보기도, 때때로 손해를 보기도 했다. 결과가 어떻든 그 선택을 내리기까지 너무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다 시간을 낭비하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어쩔 수 없이 DECISION 기계를 구매해 설치해 뒀던 것이다. 고민이 있을 때마다 기계 앞으로 다가가 과거의 결정으로 이미 아래에 도착해 있는 쇠구슬을 도로 주워 질문과 함께 맨 상단에 올려놓으면 끝. 그러면 쇠구슬이 개미집처럼 수많은 갈래로 갈라진 여러 통로를 자기 끌리는 대로 이동해 세 개의 답 중 하나에 도착했다. 엑스. 되돌리기. 체크. 번역하면 하지 말기. 다시 시도하기. 혹은 그대로 진행하기. 그의 대부분의 결정들은.. 2024. 1. 31.
고양이 세계 그 고양이는 비가 주적주적 내려 흠뻑 젖은 화단에서 만났어요. 비에 쫄딱 맞은 검정색에 흰색 줄무늬를 가진 고양이는 비 따위 전혀 아량곳 하지 않는다는 듯 유유히 이곳저곳을 누비고 있었고요. 한참을 그렇게 있다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저를 발견했던 거예요. 구멍이 송송 뚫린 초록 펜스를 중간에 둔 터라 딱히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그 정도로 이 고양이는 이곳에, 이 환경에 익숙했던 거예요. 마치 이곳이 자신의 작은 국가라도 되는 거처럼요. 그때, 뭘 꼬라봐. 닝겐.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어요. 입을 오물오물 되는 거 같긴 했는데 그 속에서 한국말이 튀어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으니까요. 뭐지? 하고 조금 더 세밀하게 그 입모양을 바라봤어요. 뭘 꼬라보냐고. 닝겐.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 2024. 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