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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소개팅과 그렇지 못한 명함 평범한 소개팅과 그렇지 못한 명함 An ordinary blind date dand an unusual business card 제 명함입니다. 직남이 명함이랍시고 커다란 책을 나에게 건냈을 때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서점이나 도서관 가판대에서나 볼 법한 한 권의 소설책이 내 손에 쥐어졌기 때문이다. 책 표지를 특이한 컨셉으로 명함처럼 만든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것은 크고 두꺼웠다. 그럼에도 본디 명함이라면 갖춰야 할 모든 정보가 담겨 있었다. 이름, 직책, 이메일, 전화번호, 팩스번호, 회사 로고(앞에 (주)가 붙는 기업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 명함(?)을 멍하니 쳐다봤다. 이게 명함인가요? 그가 당연한 질문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명함이라기 보단 책 같은데요? 저에 대한 정보를 꾹꾹 눌.. 2024. 1. 9.
나를 찾아줘 1화 나를 찾아줘 Find me, somewhere in Motel 조그마한 얼굴에 잘록한 허리를 과시한 채 직사각형에 갇혀있던 여자. 그녀의 의도와 달리 담요라도 덮어주고 싶은 일말의 감정이 들 만큼 그녀는 추워 보였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그런 그녀를 아스팔트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10월의 이른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걸까. 세상은 항상 이런 식으로 굴러간다. 내가 필요할 때 그것은 그곳에 없다. 미뤄둔 공허가 찾아온다. 이자율이 센 대출 같다. 원금은 어느새 원래의 형태를 잃고 이자로 뭉쳐진 비대한 눈덩이로 변모한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항상 이런 식이다. 8차선 도로 위에 덩그러니 놓인 기분. 쌩쌩 달리는.. 2023. 12. 30.
침대의 과학 침대의 과학 Science of bed 식욕. 성욕. 수면욕. 대표적인 인간의 본성에서 남자는 두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혼자 있고 싶은 욕구. 동시에, 같이 있고 싶은 욕구까지도. 두 가지 중 어떤 게 먼저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간은 이기적이라 그 순서 따위 개나 줘버렸던 것이다. 보편적으로는. 하지만, 남자에게는 전자가 먼저인 거처럼 보였다. 인터뷰에서 그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는 늘 혼자 있고 싶었다.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요가를 하고, 혼자 커피를 마시는 게 좋았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휴일에 몇 시간이고 멍하니 밖을 바라보는 일. 그렇게 몇 달을 그러고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지고(그게 성욕인지 수면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면 둘이 되고 싶은 것이다. .. 2023. 12. 20.
한쪽 귀가 들리지 않던 남자의 후회 한쪽 귀가 들리지 않던 남자의 후회 The regret of a man who was deaf in one ear 남자의 한쪽 귀가 들리지 않기 시작한 건 불과 일주일 전이었어요. 어느 평일처럼 잠에서 깨어 커튼 사이로 드리워진 햇빛을 감상하며 새의 지저김을 듣다 문득, 오른쪽 귀가 작게 들려옴을 확인했습니다. 뭔가 웅웅하고 귀에서 울리는 거 같았어요. 이를 확인하려는 듯 남자가 오른쪽 귀를 막고 손가락을 튕겨보았어요. 탁. 탁. 왼쪽은 평소처럼 똑같은 파장과 울림으로 다가왔어요. 이번에는 반대쪽 귀를 막고 탁. 탁. 남자는 한쪽 귀를 막은 채 고개를 갸우뚱거렸어요. 확실히 그 소리가 3분의 1로 줄어들어 있었거든요. 타노스가 전 세계 인구의 반을 없애기 위해 비장하게 손가락을 튕겼는데 아무 변화도 일어.. 2023. 1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