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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단편17

결정 장얘(愛) 내가 그녀를 사랑해도 될까? 남자는 늘 결정을 내리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에게 삶은 결단의 연속이었고 그 선택에 따라 때때로 그는 혜택을 보기도, 때때로 손해를 보기도 했다. 결과가 어떻든 그 선택을 내리기까지 너무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다 시간을 낭비하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어쩔 수 없이 DECISION 기계를 구매해 설치해 뒀던 것이다. 고민이 있을 때마다 기계 앞으로 다가가 과거의 결정으로 이미 아래에 도착해 있는 쇠구슬을 도로 주워 질문과 함께 맨 상단에 올려놓으면 끝. 그러면 쇠구슬이 개미집처럼 수많은 갈래로 갈라진 여러 통로를 자기 끌리는 대로 이동해 세 개의 답 중 하나에 도착했다. 엑스. 되돌리기. 체크. 번역하면 하지 말기. 다시 시도하기. 혹은 그대로 진행하기. 그의 대부분의 결정들은.. 2024. 1. 31.
고양이 세계 그 고양이는 비가 주적주적 내려 흠뻑 젖은 화단에서 만났어요. 비에 쫄딱 맞은 검정색에 흰색 줄무늬를 가진 고양이는 비 따위 전혀 아량곳 하지 않는다는 듯 유유히 이곳저곳을 누비고 있었고요. 한참을 그렇게 있다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저를 발견했던 거예요. 구멍이 송송 뚫린 초록 펜스를 중간에 둔 터라 딱히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그 정도로 이 고양이는 이곳에, 이 환경에 익숙했던 거예요. 마치 이곳이 자신의 작은 국가라도 되는 거처럼요. 그때, 뭘 꼬라봐. 닝겐.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어요. 입을 오물오물 되는 거 같긴 했는데 그 속에서 한국말이 튀어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으니까요. 뭐지? 하고 조금 더 세밀하게 그 입모양을 바라봤어요. 뭘 꼬라보냐고. 닝겐.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 2024. 1. 20.
평범한 소개팅과 그렇지 못한 명함 평범한 소개팅과 그렇지 못한 명함 An ordinary blind date dand an unusual business card 제 명함입니다. 직남이 명함이랍시고 커다란 책을 나에게 건냈을 때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서점이나 도서관 가판대에서나 볼 법한 한 권의 소설책이 내 손에 쥐어졌기 때문이다. 책 표지를 특이한 컨셉으로 명함처럼 만든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것은 크고 두꺼웠다. 그럼에도 본디 명함이라면 갖춰야 할 모든 정보가 담겨 있었다. 이름, 직책, 이메일, 전화번호, 팩스번호, 회사 로고(앞에 (주)가 붙는 기업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 명함(?)을 멍하니 쳐다봤다. 이게 명함인가요? 그가 당연한 질문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명함이라기 보단 책 같은데요? 저에 대한 정보를 꾹꾹 눌.. 2024. 1. 9.
신록타니아 티켓 한 장 주세요 신록타니아 티켓 Ticket to ShinrokTania 나는 신록타니아에서 왔어. 신록타니아? 나는 의아했어요. 꽤나 여행을 좋아하고 세계 지리에서 1등급을 받기도 했거든요(이게 그 나라를 아는 것과 정확히 무슨 관계가 있는지 증명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내가 아는 200개의 국가 중에서 그녀가 말한 나라는 오늘 처음 들었어요. 거기다 도대체 어디야? 우루과이 옆에 있는 아주 작은 섬. 하지만 그녀는 전혀 남미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피부도 하얗고, 골격도 전형적인 동양인 체형에, 가슴은 작았거든요. 무엇보다, 스페인어는 하나도 하지 못했어요.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물론, 우리가 이렇게 만나고 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렵기는 했지만요. 우리는 데이팅앱에서 만났어요. 하지만 여기.. 2024. 1. 4.